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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거제지역 운동 재조명>
日 수탈 전진기지 거제서 저항의 불씨 지펴져 ‘들불처럼 일어나’
아주장터서 2500명 모여 ‘대한제국만세’ 울분의 목소리
거제청년회 22개 회원 1721명 독자적 항일의식 고취
일제 수탈 앞장섰던 친일 이운면장 배척 운동도 벌어져

 

제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폐쇄·특수성 때문에 고립을 벗어날 수 없는 구조였다.

지리적으로도 일본 대마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기도 했다.

일본은 거제를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 송진포에 군부대를 주둔시켜 거제를 황폐화 시키고 수산 자원이 풍부한 어장들을 강탈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난 속에서 거제지역 민중들 사이에서 저항의 불씨가 지펴졌으며 일제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온갖 고난과 수탈 속에서도 거제는 굳건히 버텨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러한 선조들의 뼈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고 일깨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거제에 있었던 독립운동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지난해 개최된 아주독립운동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는 모습.

아주 독립운동

아주독립운동은 거제 내에서 벌어졌던 3·1 운동 중 가장 크고 상징적으로 진행됐던 운동이다.

이러한 민중의 움직임은 지난 1920년대부터 청년·사회·노동·농민·사회주의운동으로 이어졌다.

지난 1919년 3월28일 통영읍내에서 약 150여 군중으로 시작된 시위운동은 이어서 통영군 소요 처음으로 연이어 4월2일 읍내, 3일 이운면 아주리, 6일 이운면 옥포리에서 시위운동으로 퍼져나갔다.

4월3일 윤택근(1891~1967)은 이인수(1900~1962), 이주근(1898~1966) 등을 모으고 아양리 장날을 맞아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이운면 아주리(지금의 아주동) 소재 아주장터에서 서양 종이에 ‘대한제국만세’라고 크게 쓴 후 집 대문에 붙이고 노상에 뿌리며 종이 깃발을 흔들며 2500여 명의 민중과 만세를 높이 불렀다.

권오진은 조선국민독립단의 명의로 관공리에게 경고문을 인쇄해 통영장날 배포하고 운동에 참여하도록 활동했다.
이날 시위로 5명이 헌병에 체포됐으며 일제의 통계와 달리 실제 체포돼 재판을 받은 사람은 총 9명이다.

6일 이운면 옥포리 망덕봉 앞에서 이어진 이 운동은 주종찬(1893~1933)을 비롯한 200여 명의 군중들이 옥포를 출발해 10리 거리의 아주시장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 행진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민중들은 아양리 소재의 이운면사무소를 점검했다.
이 과정에서 12명의 사람들이 검거돼 3일, 6일 간의 3·1운동 동안 총 21명이 검거됐으며 4명이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지난해 4월7일 아주 4·3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

 

청년회 설립

3·1운동 직후 투옥 참가자들이 석방되자 지난 1920년부터 거제 전역에서 청년회가 설립돼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청년회는 농민동맹(농민조합), 노동회(노동조합), 소년회, 체육연맹 등 각 부문별 단체를 결성했으며 지난 1924년 9월까지 거제지역 청년단체는 전체 22개 회원수 1721명이었다.

1923년경 경남지역 전체 청년단체 수가 79개였으니 당시의 거제 청년운동의 규모와 역량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20년대 거제의 청년·사회운동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다른 군소 섬 지역보다 월등한 역량을 발휘했다.

청년회의 활동 영역은 민중교육·계몽운동, 친목 도모부터, 풍수해 구제 및 모금운동, 거제운항주식회사 주주운동, 거제어업조합 총대(대의원) 선임 문제 등 지역현안까지 아우르며 다양하게 전개됐고 운항회사·어업조합과 관련한 투쟁은 일제 식민지 경제정책과 일본인 자본가의 독점에 대항하는 성격도 갖고 있었다.

1920년에 조직된 이운청년회는 부유한 양반 가문이자 동년배 동향 출신으로서 한문을 수학하고 민간 교육기관의 강사를 지내는 등 당시 지식인들이 속해있었으며 거제청년운동의 중심 역할을 선도해나갔다.

만세운동 이후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이정, 신정권, 이주권, 윤택근 등 거제사회운동과 지역 유지들을 배출한 단체로 창립회원만 200여 명에 달했다.

1914년 4월 조선청년연합회 결성으로 거제지역 거제청년연맹, 거제청년동맹 등의 연합 조직이 결성됐다.

1924년 2월11일 거제 내 분립된 7개 청년단체 대표자 20여 명이 모여 거제청년연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지역 순회 강연회 등을 실시해 계몽운동을 했으며, 이운청년회와 함께 조선, 동아일보 거제지국을 경영했다.

또한, 청년동맹 회보발행, 거제웅변대회개최, 거육제연맹결성, 거제사회운동자강화회, 노동·부인 야학 개최 등을 통해 지역의 청년·사회운동을 장악하고 민중의 교양교육을 강화해 나갔다.

 

거제지역 3·1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이운면사무소가 있었던 당시 아양리 전경.

이운면 면장배척 운동

당시 친일파들은 면장 직위를 대단한 명예로 여기고 그 직위를 이용해 중간 수탈을 꿈꾸어 일제 관료들에게 빌붙어 면장직을 매수했으며 그 대가를 면민에 대한 중간 수탈에서 찾았다.

이에 이운면민들은 행정의 부당한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발기 준비회와 발기회를 거쳐 지난 1927년 4월29일 이운청년회관에서 52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이운면면민대회를 열고 새로 부임한 지익강 면장을 배척했다.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장승포에는 망월루, 명월루 등의 유곽을 철시했고 아주시장 상인들의 음식점 휴업 등이 단행됐다.

또한 도·군 당국에 면장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도·군 질문의원설출, 면비불납 동맹 결성, 각 이장, 구장과 면협위원들이 총사직을 하기도 했다.

장승포 일대에서 시위행진을 하며 대회 회의록, 발기선언문, 표어 등을 살포하고 면장배척 대연설회를 개최하는 등 이운면 면정 마비와 ‘무정부 상태’가 연출됐으며 밤을 틈타 면사무소 내 분뇨를 투척하는 사례도 있었다.

 

<김의부 거제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 인터뷰>

“이번 기회 통해 거제의 아픈 역사 철저히 기록해야”

김의부 거제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이 본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독립염원 일제 항거를 좌우이념으로 따져선 안돼” 강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의 뿌리를 굳건히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김의부 거제문화원향토사연구소장은 거제지역 3·1운동사를 취재하던 본지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하며 “거제 내에서 거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것은 사실이다”면서 “현존한 문화를 발굴하고 활용해 잊지 말고 앞 세대에 비춰 계승해야 하는데 이러한 점이 미비한 것 역시 감출수 없는 현실이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김 소장은 또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행사들이 단발적인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면서 “시민강사를 초청해 거제독립운동 자료를 제공하고 강의와 시민교육을 반복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전국에 널리 퍼져나가도록 시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일제강점기 당시, 거제에서 조직된 청년회는 사회주의 성격을 지닌 독립운동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런 사회주의계열 운동가들이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반정부 좌익 인사로 낙인 찍혀 역사의 그림자로 사라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하지만 “당시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고 일제에 항거했던 사실만은 자명하며 이런 사실에 좌우이념을 따져선 안될 것이다”면서 “이번 기회를 통해 거제의 아픈 역사를 더 깊이, 더 철저하게 기록해 후대에 전해주는 소중한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충고했다.

 

강미영  meeey@hannam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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