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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 기울어지지 말자
권우상 명리학자·역사소설가

부처님은 29세 나이에 왕이 될 고귀한 신분과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도 버리고 스스로 고행길에 나섰지만 35세 때에는 이 고행도 버렸다. 그리고 괴로움과 즐거움, 미망과 깨달음의 대립 관념을 바탕으로 한 고행 방법으로는 진실로 인생을 깨달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와 남의 분별을 초월한 수행을 하시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보리수 아래의 좌선이었다. 「내려 놓아라!」를 한자로 쓰면 「방하착(放下着)」이다. 착(着)은 별다른 뜻이 없는 어조사로서 명령형인 「방하(放下)」를 강조하는 글자다. 「방하」란 생김 그대로 「내려 놓아라」 「놓아 버려라」는 뜻이다. 어떤 분은 「지식을 앞 세우면 모가 나고, 정에 얽매이면 종잡을 수 없이 흐르며, 의지를 고집하면 답답하다」고 했다. 상대적인 저울질 하기를 놓아 버리지 않으면,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옛날 엄존자(嚴尊者)라는 수행자가 조주(趙州) 선사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손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놓아 버리게나(放下着)!” 엄존자는 의아해서 물었다. “모든 것을 버렸는데 무엇을 더 버린단 말입니까?” 조주선사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마저 놓아버리게.” 선사의 말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의식 자체까지도 버리라는 것이었다. 옛 선사들은 이것을 알기 쉽게 이렇게 표현했다. 「짐을 지고 있지 말아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어떤 짐이든 짊어지고 살아간다. 명함은 그 사람의 짐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직함을 버리기도 한 것처럼 “저는 명함이 없습니다.“고 한다. 속이 보이는 말이다. 선가(仙家)에서는 이것을 「자기 비하의 교만」이라고 한다. 「비하」라는 이름의 교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주선사가 버리라고 거듭 말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직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있고(有), 없음(無)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바로 내려놓음이다. 흔히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한다. 여행에는 으레 가지고 다닐 짐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일생 동안 계속해서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만들어 내는 짐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일생의 종착역까지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한다. 어느 누구도 짐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 짊어지고 갈 수는 없다.

「반야심경」에 이른 대목이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물질적인 현상은 모두 실체가 없는 공(空)이며, 실체가 없는 공(空)이 바로 물질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만물의 실체는 공(空)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요소(원소)들이 집합(결합)하여 서로 작용하면서 형성되어 그렇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모여 하나의 사물(물체)이 존재하게 된 수 많은 요소들이 어떤 이유나 계기로 흩어져 버리면 있던 자리가 비게 된다. 즉 모인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실상(實相)은 공(空)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공(空)이나 색(色)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공(空)에 기울어지게 되면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고 색(色)에 기울어지면 ‘현실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래서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진공(眞空)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공은 현실적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공’을 의미한다. 인간이 본래 실체가 없는 물질적인 현상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해서 욕심을 버리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를 가르친다. 그러나 중도란 다만 ‘중간쯤’이나 ‘적당하게’를 뜻하지 않는다. 진리 자체가 중도이다. 「데이지 않을 만큼 가까이, 춥지 않을 만큼 멀리 불을 잘 이용하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을 깨달음을 얻는 방편으로 삼아라」 선가(仙家)의 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이 삶의 전부를 느끼며 살아야 한다」 <벽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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