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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권우상 명리학자·역사소설가

앙시앵 레짐의 프랑스는 구조적으로 모순이 가득찬 사회였다. 봉건적 부과조는 농민들의 삶을 짓누르는 압제로 작용하고 있었고, 신분제(1신분-성직자, 2신분-귀족, 3신분-평민)는 1750년 이후 새로 대두하는 계급 질서에 대한 질곡으로 작용했으며, 통치체제로서의 절대 왕정은 나름의 개혁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봉건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모순들과 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은 왕실이 당면한 재정적 위기였다. 루이 14세 통치 말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왕실의 재정적 위기는 미국독립전쟁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악화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제안된 귀족에 대한 민세 폐지안이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절대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반동이 일어났다. 결국 이것이 삼부회를 소집하게 된 시발점이 됐고, 프랑스 대혁명의 막을 올렸다. 1789년 삼부회 소집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됐고, 나폴레옹은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포병장교인 나폴레옹이 영국함대와의 첫 교전에서 부하사관인 쥐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들로 하여금 능력 이상을 발휘하게 하는 것, 그게 지도자의 임무다. 지도자는 부하들을 설득시키고 매혹시키며 훈련시킨다. 지도자가 가는 길이라면 지옥이라도 따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도자의 첫 번째 덕목이다. 이때가 1793년 9월25일이었다. 그는 10살 때인 1779년 5월 국왕의 장학생으로 브리엔 왕립 군사학교에 입교, 1784년 10월에 파리 사관학교 포병대에 입교했다. 그는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8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으며,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가장 노릇을 했다.
나폴레옹이 포병 소위로 발랑스 라페르 포병대에 부임할 때인 1789년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다. 1789년 11월 코르시카의 바스티아에서 민병대를 조직, 정부군에 대항하는 전쟁을 시작으로 남프랑스에서 이탈리아 원정군 포병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백전백승의 장군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797년 12월에 프랑스 학사원의 역학부문, 물리, 수학 제1분과 회원으로 선출된 것을 보면 수학과 물리에 뛰어난 수재가 아닌가 싶다. 나폴레옹이 휴가로 고향인 코르시카 섬을 방문했을 때 무거운 큰 가방에 든 것이 선물인줄 알고 어머니가 열어보니 책만 가득 들어 있어 “군인이 왜 책을 가지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책속에 내 희망과 내가 가야 할 길이 담겼습니다”란 말에 어머니는 장차 아들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25살 나이에 포병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을 질투한 살리체티의 탄핵으로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한 측근에게 “질주가 멈출 때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인간들은 배반한다. 간혹 충직한 인간도 있긴 하지만 믿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오직 나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프랑스가 아닌 코르시카 섬 출신이 24살 나이에 포병대대장을 한 것은 나폴레옹 유일하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그는 툴롱지역 전투에서 부하장병이 적군을 명중시키지 못한 것을 보고 “술병 마개는 열렸다. 마셔야 한다. 마음껏 마셔라” 하고 소리쳤다. 몸에 포탄 파편을 맞아도 지칠 줄 모르는 전투력은 늘 백전백승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항 상륙 점령, 피라미트 전투, 맘루크 기병대 대파 승리, 시나이반도 북방의 알 아리시 점령 입성, 아부키트 전투 대승, 로지전투, 밀라노 정복, 아르 콜레 전투, 리버리전투 등 수 많은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는 나폴레옹의 몫이었다. 영국과 예집트는 물론 오스트리아도 항복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은 1806년 1월 1일 황제에 올라 나폴레옹 체제가 시작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 투쟁 아니면 중상, 모략이고, 아부와 매수 아니면 죽음이다.” 대한민국에 이런 영웅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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